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모 해위해 (문단 편집) === 겨울전쟁 신화 === 그가 참전한 [[콜라 전투]]는 모든 것이 불리했다. 핀란드군 포병이 일일 1,000발의 포탄 밖에 발사할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소련군은 일일 40,000발에 달하는 포탄을 발사하였다. 병사의 수 또한 큰 차이가 났는데, [[콜라 전투]] 초기였던 1939년 겨울, 시모 해위해가 속했던 부대는 31명의 병사들로 4,000명에 달하는 소련군 1개 연대를 막아야만 했다.[[https://www.wearethemighty.com/history/this-insanely-talented-sniper-was-known-as-the-white-death|#]] 해위해는 이러한 특수한 환경에서 100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무려 542명[* 자료에 따라서는 최저 505명이다. 다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평균적으로 하루에 5명을 사살한 셈이다.]을 사살하였다. 이는 단일 저격수 역사상 최다 사살 기록으로, 당시 [[소련군]]에게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악몽이자 움직이는 재앙으로 작용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핀란드의 설원에서 위장과 방한을 위해 항상 눈처럼 흰 전투복을 입고 나타나는 그에게 '백사병(Белая Смерт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소련군은 오직 시모 해위해를 저격하기 위한 저격수 부대를 1개 소대 규모로 조직했고 그 밖에도 교란 및 사살을 목적으로 포대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를 사살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youtube(3XzmCQUPyTM)] [[Forgotten Weapons]]와 9-Hole Reviews의 시모 해위해의 M91 및 M28 리뷰 영상 그는 [[모신나강]]의 핀란드 생산품인 M28 소총을 사용하여 저격수로서 대부분의 전과를 올렸다. 또한 [[KP/-31|수오미 기관단총]]으로도 200명을 사살하였으며 기록을 보면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총기를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는 진급과 훈장을 수훈한 것에 더불어 1940년 2월 17일 스웨덴 사업가 유겐 요한슨이 해위해를 위해 특수 제작한 M28 특수 모델을 선물 받았다. 시모 해위해는 핀란드군 통계 기준 총 259명을 저격으로 사살했으며, 이와 비슷한 수의 적을 기관단총과 기관총을 사용해 사살하였다. 그가 가장 많은 적을 저격해 사살한 날은 1939년 12월 21일로 해위해는 그 날 하루 동안 25명을 저격했다. [[파일:external/yuuut.com/simo-hayha.jpg|width=450]] >1939년 12월 22일: 138명 저격 사살 (22일 간 138 명) >1940년 1월 26일: 누계 199명 저격 사살 (35일 간 61명) >1940년 2월 17일: 누계 219 명 저격 사살 (22일 간 20명) >1940년 3월 7일 (시모 해위해가 중상을 입었을 때) 총 259명의 저격 사망자가 발생(18일 동안 40명) 다른 유명한 저격수들과 차별화된 특징은 그가 전투 중 '''[[망원조준경]]'''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전에서 그는 저격에 사용한 [[모신나강|소총]]에 조준경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총에 기본적으로 달린 기계식 가늠좌와 가늠쇠를 이용하여 맨눈 시력만으로 조준하였다. 본인이 옛날 사냥꾼의 방식을 좋아해서 그랬다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그의 초인적인 저격 실력과 정신력, 그리고 우수한 근거리 전투 능력 덕분이었다. 해위해 본인이 주장한 스코프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해위해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동료들에게도 '''스코프를 사용하지 말 것'''을 권했다. 1. 스코프의 렌즈에 의한 반사광 때문에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현대의 스코프는 반사광이 적에게 노출되는 대참사를 막기 위해 스코프의 렌즈에 특수 코팅을 하거나 아니면 [[ACOG#s-3|킬플래쉬]]라는 철망 모양의 도구를 달아 반사광을 방지하지만, 2차대전 시기에는 아직 그런 보조 도구가 발명되지 않았다.] 1. 영하 20도에서 영하 40도에 달하는 당시 혹독한 설원 환경에서는 스코프에 성에와 눈이 끼어 관리가 어렵다.[* 혹한지에서의 저격은 이 문제도 매우 컸다. 어쨌든 스코프도 유리인 만큼 추운 곳에서는 성에가 끼여 잘 보이지 않거나 심하면 서리가 끼어 시야를 가려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대의 스코프는 성에 방지 코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이 또한 이 당시에는 발명되지 않았다.] 1. 스코프를 사용할 경우 반드시 머리를 내밀어 눈을 대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포착되기 쉽다.[* 현대의 스코프들은 스코프를 고정하는 마운트 링을 낮은 것으로 사용하여 높이를 낮춰 쓸 수 있지만, 2차대전 당시의 스코프들은 개 마운트 부분이 길며 특히 기계식 조준기도 겸용으로 쓸 수 있도록 설계한 경우가 드물지 않아서 높은 편인데, 이 때문에 조준시 머리의 높이가 높아져 더 눈에 띄게 된다. 또한 이 당시 소총은 대부분 광학 장비 사용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운트 높이를 지나치게 낮추면 탄피 배출과 차탄 장전이 불편해져서 내부 탄창이 있는 소총조차 단발식 소총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언급한 내용처럼 당시의 저조한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조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코프에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우선 스코프 없이 장거리에서 수월한 목표물 처치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조건을 감안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맨눈 저격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250m~300m 정도가 한계이며 그것도 어디까지나 명중 유무의 영역이지 정밀한 저격은[* 특정 부위만 맞혀서 무력화 시키는 등.]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저격수에게 있어 망원조준경은 제2의 눈이나 다름이 없는데, 해위해는 이 도구를 포기하고 오로지 맨눈으로 수백 명의 적들을 저격했다. 물론 시모 해위해가 다른 저격수들보다 초인적인 시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해위해는 스코프를 쓰지 않았던 만큼 저격 거리가 다른 저격수들보다 짧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그의 가장 긴 저격 거리는 450m의 거리[* 21세기에 나오는 소총탄의 최대 유효사거리 정도다.]에서 소련군 저격수를 역저격한 사례인데, 이마저도 저격하지 않으면 안 돼서 한 특수한 경우로, 보통 100~150m의 거리를 선호하였다.[[https://corporalfrisk.com/2016/09/27/scandinavian-sniper-finnish-and-swedish-marksmen/|#]] 따라서 그의 전투방식은 저격수로서 대단히 불리한 단점인 짧은 사격범위를 빠르고 정확한 실력으로 커버하는 식이었다. 시모 해위해가 200m도 안되는 교전거리에서 전과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바꿔 말하면 소련군 보병들도 일반적인 교전거리 안에서 해위해와 맞상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아예 가시거리 밖에서 저격이 들어오는 일반적인 저격수가 아니라, 보병들이 충분히 대응사격이 가능한 거리였음에도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여 철저하게 은폐하는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해위해의 관련 일화를 보면 저격을 할 때 입에 주변에 쌓여 있는 눈을 주워 물고 있어 입김이 새어 나와 포착되는 것을 막거나, 총구 근처의 눈을 단단하게 눌러 압착해 두어서 총이 발사될 때 눈이 흩날리지 않게 하는 기술도 썼다는 말이 나온다. 이 또한 해위해가 그만큼 저격 거리가 짧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통 저격수들이 저격하는 거리 격차로는 '입김'이 포착될 일은 거의 없다. 입김이 적에게 포착될 우려가 있을 정도로 지척이었다는 뜻이다. 눈 위에서는 접근하면서 생기는 자기 발자국과 의탁했던 자세의 흔적과 일부러 만들었던 엄폐물을 일일이 치우는 것도 고역이다. 실제로 위의 사살 전과를 보면 알겠지만 해위해는 기관단총으로도 저격 못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다시 말해 저격 이후 발각되어 소련군과 근거리 교전을 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저격수가 위치가 발각된 것도 모자라 적과 기관단총으로 교전을 벌인 적도 수차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부상은 입었지만 어쨌든 생환을 수차례 했다는걸 보면, 해위해의 담대함과 전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해위해가 해온 저격 스타일에 해당하는 [[지정사수]]라는 보직이 군대에 존재한다. 다만 지정사수는 분대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시모 해위해처럼 단독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근거리에서 저격하는 지정사수도 사격술과 완벽할 정도의 위장술은 필요하지만 저격 이후 거의 무조건 발각되며, 이후 달려드는 적들을 모조리 사살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고 위험부담도 크다. 따라서 지정사수는 호위 분대를 붙이거나 아예 분대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해위해는 그걸 혼자서 해낸 것이다. 키가 160cm에 불과한 이 단신의 조그마한 전사[* 사실 저격수는 키가 크면 불리하다. 체격이 커지면 아무 데나 숨기도 어렵고, 피격당하기 쉽고 눈에도 잘 띄기 때문이다.]는 영하 20도에서 영하 40도까지 달하는 극한의 날씨 속에서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보급도 미비한 핀란드 측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500여 명 사살이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전과를 세웠다. 그러나 1940년 3월 6일, 저격 중 소련군이 시모를 사살하려고 지근거리에서 쏘아서 폭발한 유탄의 파편이 그의 턱에 명중하였다. 이로 인해 시모는 뼈가 깨지고 얼굴의 절반을 잃는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Simo_hayha_second_lieutenant_1940.png|width=100%]]}}}|| || 재건 수술 후의 모습[* 사진을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해 일부러 일그러뜨린 것이 아닌 원본 사진이다.] || 수술 이후 외모가 상당히 망가져버렸지만, 그 당시 [[성형수술]] 수준을 감안해보면 저만큼 복원해낸 것도 무척 성공적인 셈이다. 게다가 얼굴의 반이 날아간 그의 모습을 본 모두가 살아날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대수술을 거친 후 1주일 만에 깨어났다. 그리고 그가 깨어난 그 날은 바로 핀란드의 전쟁이 끝나던 날이었다. 원래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문서의 맨 위에 있는 프로필 사진을 보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